“'이중사고'란 낱말은 이 외에도 다른 여러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는데, 우선 이것은 한 사람이 두 가지 상반된 신념을 동시에 가지며, 그 두 가지 신념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당의 지식층은 자신들의 기억을 어떤 방향으로 변화시켜야 할지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현실을 농락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이중사고'의 훈련에 의해서 현실은 침해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만족해한다. 그러나 이런 과정은 의식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확하게 수행될 수 없다. 그런데 또한 이런 과정은 무의식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날조를 한다는 느낌이 들게 되고, 그로 인해 죄의식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당의 본질적인 행위는 완전히 정직하게 수행된다는 확고부동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가운데 의식적인 기만을 감수하며 행해져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중사고'는 '영사'의 핵심이다.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면서 그 거짓말을 진실로 믿고, 불필요해진 사실은 잊어버렸다가 그것이 다시 필요해졌을 때 망각 속에서 다시 끄집어내며, 객관적인 현실을 부정하는 한편으로 언제나 부정해 버린 현실을 고려하는 등의 일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중사고'란 말을 사용할 때도 '이중사고'를 해야 한다. 이 말을 사용하면 현실을 왜곡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여기에서 다시 '이중사고'를 하면 바로 인정한 것을 지워버리는 것으로, 무한한 거짓말이 진실보다 언제나 한걸음 앞서가기 때문이다.”(297~298)”
“앞으로도 경험의 타당성뿐만 아니라 외적 현실의 존재마저 그들의 철학에 의해 교묘하게 부인될 것이다. 이미 이론(異論)에 대한 이론이 상식처럼 되어버렸다. 무서운 것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죽이는 게 아니다. 그들의 견해가 옳을지도 모른다는 게 무서운 것이다. 도대체 둘 더하기 둘이 넷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 가? 또 중력이 작용한다는 것은 어떻게 알고. 과거는 변화할 수 없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나? 과거와 외적 세계가 오직 정신 속에만 존재한다면. 그리고 정신 자체가 조절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가?“(113)
“윈스턴은 빅 브라더의 거대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그 검은 콧수염 속에 숨겨진 미소의 의미를 알아내기까지 사십 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오, 잔인하고 불필요한 오해여! 오, 저 사랑이 가득한 품안을 떠나 스스로 고집을 부리며 택한 유형이여! 그의 코 옆으로 진 냄새가 나는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모든 것이 잘 되었다. 싸움은 끝났다.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417)
감시사회는 서로가 서로를 감시함으로써, 아니, 감시된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완벽하게 통제되는 사회이다. 이는 한번 구르기 시작하면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와 같아서, 스스로가 스스로를 단련시키며 진화한다. 이 자기검열의식이야말로 최고 수준의 능력을 과시하는 감시장치일 것이다. 이를 인정한다면 모든 일상은 두 개의 자아가 구성한다고 말해야 한다. 감시하는 자아와 감시당하는 자아. 이 사회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이 두 개의 자아를 잘 관리한다는 말일게다. 감시당한다고 생각하며 이에 항거할 때조차도 그 저항은 의식 뒷면에 감시하는 자아를 숨겨놓음으로써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감시하는 자아를 내세웠다가는 죄의식 때문에 온전히 항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두 개의 자아를 생산하도록 뒤에서 추동하는 것이 바로 윈스턴이 말하는 ‘이중사고’이다. 이런 감시사회에서라면 우리는 상반된 두 개의 신념을 아무런 모순 없이 지니고 있는, 그래서 필연적으로 이중배역을 하고 있는 운명일지 모르겠다. 무의식적으로는 끊임없이 과거의 기억들을 날조하면서도, 의식적으로는 그것을 날조하는 작업을 태연하게, 그렇지만 정확하게 수행한다. 때때로 그렇게 행한 사실도 잊고 그런 것을 비판하기조차 하면서 말이다. 자신이 하는 일이 민주주의에 반하는 줄 알면서도 ‘모르는척하며’ 행하고 잊어버리는 것, 회사에서의 과업이 자본주의적 착취를 심화시키는 일인 줄 알면서도 ‘모르는척하며’ 행하고 잊어버리는 것 - 공무원, 법률가, 대기업 회사원, 은행원 기타등등 그들은 영락없이 이중사고의 소유자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특정한 중심부에 존재하는 인물들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복잡한 사정에 있다. 농도의 차이일지 몰라도, 이중사고 자체는 자본주의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예외 없이 적용된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판매하고, 노동과정에 들어가는 순간 자본가의 잉여가치 착취에 기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는 노동의 신성함을 소리 높여 말한다. 교환관계를 격렬히 비판하는 철학자조차도 자본주의 비판서를 출판하여 유통시장에 내놓는 순간, 상품판매자로서 역할을 충실하게 소화한다. 그러나 잠시 상품판매자의 자리에서 돌아서 나오는 순간, 자신만큼은 교환관계로부터 초월한 양 순수한 진리의 이름으로 그런 사태들을 망각하려한다. 결국 중심에 있으나, 주변에 있으나, ‘이중사고’ 없이는 시장이라는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듯하다. 왜냐하면 모든 구성원이 모순된 신념을 지녀야만 살아 갈 수 있도록 사회가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장은 이 모순을 먹고 산다. 감시하는 자-감시받는 자, 날조하는 자-망각하는 자, 착취하는 자-착취당하는 자, 비판받는 자-비판하는 자. 그들은 동일인이다.
따라서 서로 상충되는 단어들을 대비시켜놓은 ‘진리부’의 모토는 역설적이게도 이 사회의 핵심을 타당하게 설명하고 있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이런 사회가 대중을 통제하는 방식은 모순된 신념과 삶의 방식을 한 사람에게 확실하게 구현시켜놓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대중을 감시하면서 감시당하고, 날조하면서도 그 사실을 망각하고 믿으며, 착취하면서 착취당하고, 비판하면서도 그 비판의 대상이 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들로 생산해낸다. 이 생산 프레임 자체가 거대한 착취구조인 것이다. 조금만 이 틀을 벗어나면, 빅브라더가 윈스턴을 지독한 고문으로 끝내 자신을 사랑하도록 개조해 버리듯, 다시 이 프레임으로 되돌아오게 만들어버린다. 이중사고의 무서운 점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죽이는 게 아니다. 이런 이중사고의 틀을 의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당의 견해가 옳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끔 하여 그 틀을 벗어나는 걸 두렵게 만드는데 있다. 감시사회-이중사고의 사슬은 내 두려움이 만들어낸 쇠철방의 재료들이다. 평화는 전쟁, 예속은 자유, 힘은 무지.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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